꾸질꾸질한
밥먹고나니 식곤증이 퐉!!!!!!!!!!!!
오늘은 어제 포스팅한 루이지 꼴라니에 이어서 샤넬에 대해 포스팅 하겠습니다.
럭셔리의 대명사
검은색 샤넬 원피스에 금목걸이나 진주목걸이를 화려하게 걸치고,
금장식이 된 샤넬의 토트백을 팔에 살짝 걸친다.
이 정도면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고품격의 옷차림이 완성된다.
샤넬의 패션이 세상에 선보인 때가 1차 세계대전 전후이니,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동안 샤넬은 세상 모든 여서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 셈이다.
번잡하지 않은 현대적인 아름다움, 여성의 우아함, 넘보지 못할 도도한 귀족성 등
‘샤넬’이라는 이미지에서 떠오르는 인상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2005 SS

















2006 FW






















2008 SS









샤넬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검은색이 먼저 연상된다.
샤넬이 세상에 처음 선보인 옷도 검은색이었고, 수십년 동안 여성들을 들뜨게 한 옷들 또한 대부분 검은색이었다.
샤넬의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는 모자나 원피스, 재킷, 핸드백, 등에서 검은색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매장 인테리어나 광고 등에서도 검은색은 샤넬을 알리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샤넬이 검은색을 만들었는지 검은색이 샤넬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검은색이 샤넬의 강력한 상징인 것만은 확실하다.
패션에서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몸을 장식하거나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면, 검은색은 가장 불리한 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샤넬은 이 검은색을 자기 패션의 중심에 놓았다.
검은색 목걸이, 검은색 손지갑, 샌들은 검은색 원피스를 통해 드러난 여성의 매력을
한층 강화하면서 패션을 총체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이처럼 옷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패션 소품들을 조화시켜
상승효과를 시도하는 것을 ‘토탈 패션(Total Fashion)'이라고 하는데, 이런 개념을 최초로 확립한 사람이 바로 샤넬이다.
천재들의 행도가 대개 그렇듯이,
샤넬은 검은색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역주행하면서 샤넬스러운 패션의 문법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냈다.
보기에는 그저 화려하고 비싼 명품 브랜드에 그치는 것 같지만,
그이면에는 이처럼 탁월한 예술적 시도가 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샤넬의 손을 거친 검은색은 그 어떤 원색보다 화려한 색이 되어서 여성들을 돋보이게 한다.
이는 그 이전 시대에서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현대 여성과 과거의 여성을 분리하는 경계선이 되었다.
시대를 디자인하다
“현대 의상은 기본적으로 샤넬로부터 온 것입니다.”
철학자 김용옥은 자신의 저서<도올선생 중용 강의>에서 샤넬의 업적을 이렇게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샤넬이라는 디자이너의 진면목은 단지 돈있는 호사가들을 위한 옷을 잘 만들어 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의 기본 체계를 만들었다는데 있다.
현재 우리가 입고 있는 현대 서양 복식의 가장 큰 특징은
허리를 중심으로 해서 옷을 위아래로 나눈다는 점이다.
이렇게 상의와 하의로 나뉜 옷에서,
특히 하의는 하체에 딱 달라붙는 바지나 치마의 형태를 가지기 때문에 활동하기에 편리하다.
샤넬은 20세기 초반, 바로 이러한 현대 복식이 구체화되는 시기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샤넬의 의의는 단지 현태 복식의 스타일을 만들어 낸데 국한되지 않는다.
샤넬의 진정한 업적은 바로 옷의 존재 이유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옷을 ‘입는 사람’에게로 되돌려 주었다는 데 있다.
샤넬 이전의 옷, 특히 여성복은 우리가 그림이나 영화에서 익히 보았듯이 화려하긴 하지만 불편하기 짝이없는 옷들이었다.
샤넬 패션의 특징은 단순성과 실용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주도한 복식 혁명은 20세기 초반의 혁명적인 시대 분위기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능주의의 확립, 샤넬 자신의 취향 등이 총체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의 패션 혁명은 더러운 연못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샤넬이라는 여자의 고단했던 삶으로부터 만개하기에 이른다.
샤넬의 어린시절
오늘 날 샤넬은 럭셔리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정작 그녀 자신의 삶은 럭셔리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1883년 8월 19일, 행상인 알베르 샤넬의 동거녀 쟌느 드볼은 갑자기 산기를 느낀다.
거친 경제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제대로 된 조산원도 아닌 헐벗은 구호소 한쪽에서 아이를 낳게 만든다.
훗날 ‘코코(coco)'라고 불리게 되는 가브리엘 샤넬(Gabriel Bouheur Chanel)은 이렇게 럭셔리함의 반대편에서 태어난다.
열두 살에 가난과 결핵으로 어머니를 잃고, 무책임한 아버지는 그녀를 수도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겨버리고는 홀연히 떠나버린다.
그 후로 샤넬은 평생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다.
샤넬은 이때부터 몽유병을 앓았고, 회상하기 싫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녀가 회고하듯이 천성적으로 자유분방하고 고집 센 여자아이가
규율과 엄격함이 강요되는 고아원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보아온 수도사나 수녀들의 단순하면서도 검은색의 제복은 이후 샤넬의 패션에 중대한 영감을 제공한다.
만일 그녀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단순하면서도 검은색의 원피스나 슈트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샹류사회로의 진입
18세 이후로는 고아원에서 나와 의지할 곳 없는 하류인생을 살게 된다.
샤넬은 유아용품점에 취직했다가 그만두고,
낮에는 양재 보조로 밤에는 기병들이 드나드는 싸구려 바에서 댄서와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타고난 탤런트 기질이 있었던지 지역의 음악 콩쿠르에 입상하기도 하고,
비록 큰 무대는 아니었지만 아르바이트하는 바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다.
이때 자주 불렀던 노래 때문에 샤넬은 코코라는 애칭을 얻었고, 이 이름은 평생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가수 생활은 그녀의 인생에 엄청난 전환점이 된다.
기병대 장교로 파견된 에띠엔느 발상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에서 고아 출신에 교육도 받지 못한 처녀가 상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은 능력있는 남자의 정부가 되는 길밖에는 없었다.
이는 가난 속에서 죽어간 어머니의 추억을 가진 샤넬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었다.
똑똑한 샤넬은 자신의 매력으로 에띠엔느 발상을 단번에 매료시켰고, 그의 도움으로 환골탈퇴의 인생을 맞이한다.
고맙게도 에띠엔느 발상은 샤넬을 자신의 호화로운 별장에 두고 그녀의 촌티를 완전히 벗겨준다.
여기서 그녀는 상류사회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매너와 교양 등을 익혔다.
그녀는 이곳에서 승마도 배웠는데, 이 때 남성용 승마바지를 개조해 입고 나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지금이야 유니섹스가 일반적인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남자와 여자의 옷은 완전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남성복을 모티브로 편안하고도 품위가 있는 디자인을 추구한 샤넬 패션의 근본 개념은
이때부터 이미 싹트고 있었다고 불 수 있다. 이후로도 샤넬은 패션계에 입문하기 전부터
남성복을 응용한 옷들을 많이 만들어 입고 다녔다.
에띠엔느 발상의 후원에 힘입어 샤넬은 상류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였고,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아르튜르 샤펠’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아르튜르 샤펠은 꽤나 능력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으로 뉴캐슬 지방의 석탄 채굴회사 주식도 엄청나게 가지고 있었고,
폴로 사업에도 수완이 있어서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커다란 능력은 샤넬을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키웠다는 점이다.
샤넬은 그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패션에 입문
샤넬의 인생이 처음부터 패션에 맞추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 행로는 조그마한 모자가게에서부터 시작한다.
샤펠의 도움으로 샤넬은 깡봉가에 모자가게를 냈다.
당시는 화려한 모자가 유행이었지만,
그녀가 만든 모자들은 단순한 모양들이어서 동시대의 감각과는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선보인 새로운 스타일의 모자는
영화계나 잡지, 사교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유행감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샤펠과의 관계가 널리 알려지면서 그녀는 본의 아니게 파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샤넬의 일시적인 도피는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패션에는 축복이 된다.
소위 ‘되빌룩(Deauville Look)'이라 불리는 샤넬 특유의 패션 세계가 정립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북부 해안의 되빌로 이주한 샤넬은 구땅비통이라는 거리에 작은 옷가게를 열고 본격적으로 패션업을 시작한다.
당시 샤넬은 불라우스나 프리스타일의 셔츠, 스트레이트형 스커트 등 남성복의 특징이 보이는 베이지색 맞춤복을 내놓았다고 한다.
특히 한가로운 해변 마을의 스포츠 라이프에 영감을 얻어서 만든 되빌룩은
향후 1920년대를 ‘되빌 시대’라 부를 정도로 유명해진다.
이 되빌룩은 이전까지 남자들의 속옷에나 사용했던 저지 소재를
본격적으로 여성복에 사용하거나,
늘어진 진주 목걸이와 그을린 피부를
패션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등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많았다.
요즘이야 선택한 구릿빛 피부가 각광을 받지만,
그 당시에는 오직 농부와 거리의 인부만이 태양에 노출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되빌룩은 향후 20세기의 패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23년 미국의 패션잡지 바자는 되빌룩에 대해 장장 6페이지에 걸쳐 소개한다.
이를 계기로 샤넬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입지를 마련하였다.
1차 세계대전 후 입지를 굳히다
1차 세계대전은 전 유럽을 재앙에 빠뜨렸으나 샤넬에게는 천우신조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남성들은 전쟁터로 떠났으며,
공장과 회사에서는 여성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활동하기 편리한 샤넬의 옷은 일하는 여성들에게 아주 적격이엇다.
이전에는 남성들의 속옷에나 사용했던 저지 소재를 여성복에 본격적으로 사용하여,
샤넬은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헐렁하고 자유롭고 유연성이 뛰어난 옷을 만들었다.
실용적 디자인관
1차 세계대전 후, 샤넬은 거의 본능적으로 추구해왔던 실용성의 문제를 구체적인 패션 원리로 언급하기 시작한다.
“화려함이란 심플한 요소를 눈에 띄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말은
단지 자신의 패션을 설명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조형성에 대한 당시의 미학적 이해를 한마디로 정리한 듯 하다.
“거리에서는 평범해 보이고, 맥심(파리의 레스토랑)에선 최고의 찬사를 받는 디자인을 하곗다”는 말 역시
상당한 미학적 깊이를 담고있다.
샤넬이 실용성과 심미성을 정확히 구분하고
그 중에서도 실용성의 문제를 디자인의 중요한 근거로 파악했다는 점은,
1차 세계대전 후 그녀가 자신의 디자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상당히 정확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울러 그녀의 야망이 단지 현실적, 경제적 성공을 뛰어넘어 시대의 전설에 이르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샤넬이 사라진 오늘날까지 샤넬의 디자인이 생생한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샤넬의 실용적 디자인관으로 인해 그녀의 옷에는 손을 넣을 수 있는 포켓이 반드시 들어가고,
모든 단추에 단춧구멍이 따르며, 재킷의 실크 안감은 무게감을 주기 위해 체인 바이어스를 하는 등
장식으로 대충 넘어가는 부분이 없어졌다.

